전시 소개
아이들 앞에 정체 모를 보따리가 놓여 있다. 그 보따리는 그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한 채 싸늘하게 식어간다. 보따리 안에 들어있던 뭔가 뜨거운 것은 파란 늑대가 삼켰다가 빨간 앵무새에게 옮겨가 뱉어지고, 식어 굳은 후 노란 공룡이 된다. 너무 비대해 세상에 삼켜지지 못한 공룡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 그 파편을 초록 사슴이 물고 가다 끝내 삼키지 못해 토해내며, 그 틈으로 검정 뱀이 파고든다. 뱉어 낸 것이 다른 몸 안으로 들어가 삼켜지고, 삼킨 것이 다시 내뱉어져 순환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서로 다른 색으로 존재하던 인물들은 처음으로 색을 뒤섞으며 마주하기 시작한다. 김희재의 신작 영상 〈아주 아주 긴 로맨스〉가 보여주는 것은 매개의 실패다. 보따리가 식어버린 이후의 연쇄는 같은 실패를 되풀이한다. 무엇을 완수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매번 어긋나는 자리에서 다음 항으로 미끄러지는 연쇄는 남겨진 것의 과잉을 초래한다. 그것은 오늘날 도시를 살아가며 온갖 것과 수없이 접속하는 몸이기도 하다. 존재들은 보따리를 메고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비존재 사이를 이동하며 감정과 기억을 전염시키고, 전달되지 못한 말들을 운반한다. 이들이 삼키고 뱉어서 소화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발효되고 왜곡되며 공동체 내부를 떠돈다.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구조 속에서 모순은 해소되지 않고 변형될 뿐이다. 죽은 자는 제삿날마다 돌아오고, 매번 다시 살아나는 신화를 반복하는 제사 의례가 그렇듯. 이번 전시 《IT’S ALL DINOSAUR》에서 모티브가 되는 제주 제삿상의 ‘보따리전’은 조상에게 노잣돈이자 양식을 들려 보내는 의미지만, 동시에 그 자리에 모셔지지 못하는 존재들을 향한 마음이기도 하다. 남겨진 잉여 ‘무주고혼’, 누구도 받아먹지 못하는 보따리전, 이들은 해소되지 못한 채 공동체 바깥에서 그저 의례와 신화의 형식으로 남은 무엇이다. 그간 미술계에서 새로운 친족 만들기, 돌봄의 재설계, 대안 공동체 같은 언어들은 광범위한 창작의 문법이 되었지만, 긍정의 관계망 바깥에 남겨지는 존재의 문제는 종종 회피되었다. 작가가 제주 신화에서 가져와 자신의 언어로 삼은 무주고혼, 즉 이승과 저승 어디에서도 속하지 못한 이것은 작업 안에서 대안 공동체의 새로운 가능성에 포섭되지 않고 회피된 지점으로서 존재한다. 순환하는 자들과 그 바깥에서 떠도는 자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는, 결핍의 고발이 아니라 공동체가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다. 어떠한 장소성도 읽히지 않는 노란빛 무성의 공간 가운데 LED 패널 영상만이 감각적인 화면, 선명한 색감, 테크노 비트의 진동과 사운드를 뿜어낸다. 〈아주 아주 긴 로맨스〉는 몰입도 높은 스토리 전개와 함께 AI VFX, 3D 애니메이션, 2D 그래픽이 만들어내는 매끄러운 표면으로 직조되어 있다. 작품의 형식으로 채택된 뮤직비디오같이 화려한 편집, 광고사진의 문법을 그대로 들여온 보따리맨의 이미지는 오늘날 가장 자본 집약적인 이미지 생산 기술이 만드는 표면이다. 스포츠웨어를 착용하고 셀카를 찍어대며 반복적인 움직임과 군집 행동을 수행하는 인물들의 자기관리와 가시성의 논리는, 손을 내밀지 못해 식어버린 보따리의 시간과 기묘하게 포개진다. 두 시간성은 통합되지 않은 채, 하나의 몸 위에서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민속과 무속의 의례와 테크노의 비트, 신화적 시간과 도시의 시간, 능동적 거부와 신자유주의가 모르는 수동의 존재 방식. 이들은 매끄럽게 합성된 혼종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봉합선을 지우지 않은 채 한 몸 위에 공존하는 상태이며, 공동체 형식이 내용을 그대로 살아낸다. 또한 충돌을 몸으로 구현하는 것이 이번 영상 작업의 주요한 연출 언어다. 작가는 테크노의 반복적 박동을 서사의 리듬 구조로 사용하고, 라반 무용 기법을 통해 인물들의 움직임을 조직한다. 테크노의 비트가 서로 다른 몸들을 일시적으로 같은 주파수 안으로 끌어당기는 힘, 곧 익명적 집단 리듬으로 개별성을 유예시키는 장치라면, 라반은 정반대의 운동성을 지닌다. 몸이 지닌 고유한 무게, 긴장, 저항을 감각하게 하여 유예된 개별성을 도로 꺼내는 것이다. 이 마찰 속에서 공동체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실패하며 다시 시도된다. 영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들이 색을 뒤섞으며 마주하는 것도 완성된 퍼포먼스가 아니라 연습의 과정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동작이 아니라, 서로의 리듬과 긴장을 감각하며 조율하려는 시도 속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다. 어긋남을 껴안으며 다시 같은 파동 안으로 들어가 보려는 것, 통합이 아닌 동기화되지 않은 공존이 공동체의 형식이다. 다섯 색의 존재 중에서도 노란 공룡은 다른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을 마주한 자는 누구도 다시 돌아오지 못했기에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결코 이 매끄러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다른 네 존재가 뱉어내고 삼켜지며 형태를 바꾸어가는 동안, 노란 공룡은 본 적 없는 비존재로, 매개되지 않는 잉여로 남는다. 매끄러운 기술이 만든 표면 위에 직시할 수 없는 것을 들여놓는 이 구조는 우연한 균열이 아니라 의도된 설계로 읽힌다. 매끄러움을 형식으로 취하면서도 그것을 믿지 않는 거리감이, 가장 압도적이고 가장 오래 직시하지 못한 것을 끝내 봉합하지 않은 채로 세워두는 일과 같은 자리에서 발생한다. 자본이 만든 표면은 결국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한 개별자의 성격 결함이 아닌 시스템의 부산물이자 피해자의 정서 앞에서 어떻게 무력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다. 결국 완전한 공동체는 존재한 적이 없고, 따라서 지금 이 어긋남과 배제와 잔여들은 극복해야 할 오류가 아닌 공동체의 내부 구조 그 자체이다. 작가가 선택하는 수동성은 무력함이 아닌 분명한 의지의 행사로서 거부에 가깝다.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정, 혈연의 논리를 따르지 않겠다는 선택, 그러나 거부한 이후에도 돌아오는 것들이 있다. 분명 밀어냈음에도 다시 나타나는 것들, 탈출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형태로 다시 떠도는 것들, 이런 돌아옴은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다. 받는 것, 먹히는 것, 발효되는 것, 감염되는 것.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거부도 수용도 능동적으로, 모든 것을 선택과 책임의 언어로 처리하는 주체다. 이 작업이 살아내는 방식은 그 처리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데 있다. 무주고혼이 의례 안에 머무는 것처럼, 보따리 앞에서 식어버린 그 손들처럼, 노란 공룡이 끝내 매끄러운 표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그것들은 작업 안을 떠돌며 타인의 몸 안으로 이동한다. 그 이동이 공명이다. 오세원(씨알콜렉티브 디렉터) 참여작가: 김희재 출처: 씨알콜렉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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