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4등급
미묘지색微妙之色: 고려백자와 조선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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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소개
고려백자, 열망의 빛깔 고려백자는 고려 초기부터 청자 가마에서 부수적으로 소량 만들어졌다. 이후 10세기 후반~11세기 무렵에는 용인 서리와 여주 중암리 등에서 백자 가마가 운영되면서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그러나 11세기 후반 이후 청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백자의 위상은 점차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강진과 부안의 일부 가마에서는 고급 청자에 견줄 만한 백자가 소량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양질 백토의 확보와 안정적인 고온 번조의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백자의 제작량이 청자에 비해 크게 적었다. 그럼에도 백자의 생산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당시에 백색 자기에 대한 열망이 컸음을 보여준다. 고려백자는 조형적으로는 청자와 같지만 태토(胎土)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고려백자는 청자에 비해 산화철 성분이 적은 점토를 사용하여 백색도가 높았다. 그러나 질이 떨어지는 백자의 경우는 잡물이 섞여 탁한 회백색을 띠는 경우도 있다. 또한 번조 과정에서 완전한 자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연질인 경우가 많고, 태토와 유약의 융착이 불완전해 표면이 고르지 않거나 유약이 들뜨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러한 기술적 한계 때문에 고려백자는 청자의 주변부에 머물렀지만, 그 희소성과 과도기적인 성격으로 인해서 감상과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청자, 상징의 빛깔 조선 15세기는 분청사기·백자·청자·흑자 등 다양한 자기가 함께 만들어진 시기이다. 그러나 1460년대 경기도 광주에 왕실 전용 가마인 관요(官窯)가 설치되면서, 이후 백자가 조선을 대표하는 그릇이 되었다. 관요에서는 17세기 후반 무렵까지 백자와 함께 소량의 청자를 생산하였다. 이 시기의 청자는 고려 말 상감청자를 계승한 분청사기와 달리, 밝은 태토 위에 청자 유약을 입힌 그릇으로, 백태청자 또는 백태청유자로 불린다. 청자는 백자와 조형적으로 같으며 유색만 달랐다. 조선 초기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 청자가 생산된 이유는 왕실 특히 동궁에서 청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문헌에 따르면 조선 왕실에서는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기명이 엄격히 구분되었다. 『경국대전주해』(1554)에는 어선(御膳)에는 백자, 동궁(東宮)에는 청자, 예빈(禮賓)에는 채문기(彩文器)를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구분은 17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으나, 이후 청화백자의 제작이 늘고 신분에 따른 규제가 완화되면서 청자의 생산이 중단되었다. 동궁에서 청자가 사용된 이유는 유교적 음양오행 사상과 관련된다. 세자는 새벽과 동쪽, 청색을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관념이 기명 선택에 반영된 것이다. 조선청자는 조선 왕조의 사상과 이념이 도자기에 구현된 사례이다. 출처: 호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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