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1등급
Faisandage
전시 소개
‘페상다주((Faisandage)’는 사냥한 동물을 바로 조리하지 않고, 어둡고 축축한 곳에 걸어두어 조직이 서서히 분해되고 변형되기를 기다리는 과거 프랑스의 수렵 요리법이다. 이는 살아 있는 것을 죽게 하고, 죽은 채로 보관함으로써 ‘죽음의 시간’을 통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이 유예의 시간 속에서 고기, 즉 시신의 ‘신선함’에 대한 기준은 새롭게 정의되며, 죽음이 빚어내는 독특하고 값비싼 풍미가 탄생한다. 그렇다면 이때의 ‘신선함’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어떤 동물보다도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후의 육신을 처리해왔다. 죽은 자를 그곳에 가만히 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땅에 묻거나, 물에 띄워 보내고, 불에 태우기도 했다. 공동체에 영혼과 지혜를 머물게 하기 위해 나누어 먹기도 했고, 혼이 떠난, 쓸모없어진 육신을 새에게 베풀어 하늘로 떠났다고 믿었다. 이 모든 과정의 순서와 이유는 무엇을 어떻게 소멸케 할 것인지, 어느 시점부터 소멸되었다고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합의하는 것뿐이었다. 반복되는 시작과 끝, 그 사이의 삶,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죽음, 대기 중인 다음 삶, 죽음을 먹고, 먹혀서 죽는 삶의 맛, 소화와 흡수, 배출된 것이 다시 어디론가 흡수되는 모든 것의 경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위한 노력 말이다. 감각과 사유, 제작과 완성의 영역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이는 것과 내보내는 것은 구분할 수 없이 반복되며 축적 되고 흘러간다. 예술가는 그 흐름 속에서 특정한 감각에 더 오래, 더 깊게 머무는 존재다. 어느 날 갑자기 거의 들리지 않던 미세한 잡음이 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귀를 찌르는 경보 신호로 울리고, 늘 분명히 알아차릴 수밖에 없던 일상적 조건들에 완전히 무신경해지기도 한다.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 수많은 입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도하게 입출력하며, 변형시키고, 몸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다. 나는 그러한 창작과정이 죽음과 삶 사이 명백하게 분리되지 않은 순환 속에 꽤나 분명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행위라고 믿고있다. 최수진의 밤을 통과하는 레시피 Painter’s Recipe는 이러한 흐름을 기류이자 시간의 덩어리로 띄워 보려는 시도다. 잠과 그리기, 요리는 작가의 하루를 빈틈없이 채워 서로를 침투하고 변형시킨다. 잠자기에서 그리기, 그리기에서 요리하기로 넘어가며 유영하는 선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며, 여의치 않을 때는 다른 덩어리로 뭉쳐진 채 툭 튀어 올라 스스로를 드러낸다. 선은 글씨가 되어 속삭이다가도 이내 글씨인 적이 없었던 양 흐릿하게 입자가 되어 색으로 빛난다.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호흡과 수분, 먼지로 축적된 밀도로서의 색은 먼 항성의 빛과 열을 만나 대기가 되어, 날씨와 계절로 살아 있는 것들을 품어 계속해서 어딘가로 데리고 간다. 어제와 내일을 구분해 보려 그었던 획은 아침과 저녁, 새벽의 색을 머금은 채 붓끝으로, 실을 견인하는 바늘의 끝으로 따라다니고, 안과 밖을 가로지르며, 뭉개진 목소리와 메시지로 서로를 붙잡는다. 그러나 성긴 틈 사이로 빠져나간 것들은 붙잡지 못한다. 다만 사라지지 않고 다음으로 보낸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전제 아래, 또 다른 잠으로 넘어간다. 꿈에서는 누구도 완전히 도망칠 수 없다. 우리는 도망치고 있는 꿈을 꿀 뿐이다. 그렇게 깨어나 버린 감각은 다시금 무엇이든 손에 닿는 것들로 잠든 상태를 추적한다. 작가는 그것을 움켜쥐어 봤다가 이내 풀어주며 푸르고 붉은 물에 푹 담갔다 꺼냈다. 스며들어 얼룩진 ‘깨어 있지도 잠들어 있지도 않은, 몸의 회복도 꿈의 모험도 하지 못한 뒤섞인 시간’”¹을 허공에 걸어 두었다. 우한나는 2019년부터 이어온 내장 모티프 조각 연작의 네 번째 시리즈 Bag with you_Cook or be Cooked를 환대와 폭력이 혼재된 행위인 ‘요리’로 확장한다. 작가는 싱크대와 조리대, 가스버너, 식탁이 길게 연결된 구조를 통해 주방과 식사의 공간을 약탈을 위해 항해 중인 해적선으로 전환한다. 이 선형의 장치는 포획, 조리, 소비가 연속되며 맹목적으로 전진하기만 하는 생존의 장면을 구조화하고, 그 안에 놓이고 매달린 ‘내장적 조각’들을 파편화한 타자의 신체이자 곧 섭취될 음식으로 차려낸다. 사실 내장 기관을 가까운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곳은 병원이 아닌 시장과 주방, 그리고 테이블 위다. 줄줄이 걸려 있거나, 바가지에 종류별로 담겨 있는 덩어리들, 손질된 채로 줄을 세워 가지런히 널려 수확된 여러 가닥과 줄기들은 원래의 파릇하고 맑았던 빛깔에서 요리될수록 붉고 검게 퇴색되고, 그렇게 맛은 값으로 바뀐다. 작가는 그 구조 속의 관계를 요리하는 자와 요리되는 자, 더불어 그 둘의 관계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벌판(야생)과 시장, 주방의 생존 변칙법은 알 필요도 없는 디너 테이블 끝의 미식가인 포식자를 도마 위에 올리듯 이 해적선 위에 승선시킨다. 그는 그들의 위치가 언제든 끊임없이 뒤바뀔 수 있는 상태임을 예언하고 동시에 그러기를 희망한다. 오늘 당신은 무엇을 먹었는가? 우리는 늘 죽기 직전의, 또는 살아 있었던 것만 먹었다. 슈이 차오가 상상한 혼종 생명체 Sea Lung”²은 지표가 솟아 생긴 절벽과 바다 속으로 깊게 꺼진 해구, 인간이 광물을 다시 배합해 세운 건축물을 가리지 않고 그 표면을 터전으로 삼아, 균열에 스며들어 이끼가 맨 바위에 오래 머물며 돌을 천천히 흙으로 바꾸듯, 광범위한 생애 주기를 가진 그들만의 속도로 상태를 전환시킨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시간, 금속이 녹스는 시간, 모래가 유리가 되는 시간은 느리거나 빠르다고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겹쳐지며 표면으로부터 점차 장소 자체가 되어 간다. 형태라기보다 상태이고, 개체라기보다 관계이며, 눈앞의 물질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다른 무엇이 되어 가는 속도를 감각하게 하는 과정에 가깝다. Sea Lung을 포함한 작가의 작업에 원형이 되거나 재료로 쓰이는 조개의 일부는 그가 떠나온 고향에서 온 것들이다. 그곳은 잘 알려진 해산물 시장이 있는 도시로, 그의 가족은 식사가 끝난 뒤 남은 조개껍데기를 깨끗이 씻어 말리고 가지런히 겹쳐서 보관해 두었다가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 건네준다. 이미 알맹이를 한 번 품었던 조개껍데기는 식탁을 지나 가족의 손을 거쳐 바다 건너 그의 작업실에 도착한다. 슈이는 이 조개를 3D 스캔해 디지털 공간에서 다시 구성한 뒤 유리로 주조한다. 원가족과 나. 떠나온 곳과 정착한 곳. 바다와 육지. 조개와 유리. 디지털 스캔과 물리적 캐스팅. 그렇게 조개는 유리로 옮겨 가고, 유리는 다시 모래를 기억한다. 스며드는 죽음은 곧 세계를 조직한다. 잠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요리가 되며, 요리는 다시 누군가의 몸이 된다. 내장은 식탁 위를 지나 타자의 살에서 나의 살로 이동하고, 돌은 이끼와 균류를 통해 지질로 대사된다. 사실은 아무것도 소멸된 적이 없는 세계로 죽음만이 스며든다. 1 최수진 작가노트 2 동남아시아의 바다달팽이와 북미 전역에서 발견되는 폐이끼(lungwort lichen)를 결합한 존재 참여작가: 우한나, 최수진, 슈이 차오 출처: 지갤러리
모든 전시 정보에 대한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전시 정보는 변경되거나 오기입될 수 있으니 방문 전 각 기관에 확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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