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3등급
권세진 개인전 조각모음 Defrag
전시 소개
권세진의 회화는 대상을 마주하는 신체적, 환경적 조건과 그로부터 파생된 엄격한 규칙이 동반되며 발동하는 이미지의 역학을 탐구한다. 《조각 모음: Defragmentation》은 휘발하는 촛불과 연기의 형상을 규격화된 종이와 전통 재료인 먹의 물질적 조합으로 매개한다. 이는 단일하게 포획되지 않고 사라지는 비물질적 대상의 특성을 화폭의 크기를 제한하고 재료의 성질을 거스르며 고안한 정교한 규칙에 대입하는 실험이다. 이러한 시도는 조르주 바타유의 ‘비정형(L’informe)’ 논의를 경유하여, 사물의 상징을 와해하고 그 기저의 작동적 힘을 드러내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이렇듯 대상에 내포된 질서에 질문을 던지며 그리기의 과정을 공정화한 그의 회화는 완결성과 순수성을 밀어내고 구조적 질서로부터 출현하는 동시대적 회화를 추동한다. 그가 그리는 촛불과 연기는 사진 파일 기반의 소셜 큐레이션 서비스인 핀터레스트(Pinterest)에서 무작위적으로 수집된 파편적 대상에 불과하다. 알고리즘에 의해 무한히 투사되는 시각 데이터를 무심하게 소비하는 웹 환경의 문법은 사물이 지닌 관습적인 메타포를 차단하고 사진 고유의 맥락을 소거하려는 작가의 의도와 공명한다. 바타유의 ‘저급 유물론’ 관점을 빌릴 때, 촛불과 연기는 영성의 빛이나 타버린 잔해라는 보편적 함의를 탈피해, 흥미롭게도 작가가 신체적으로 제어 가능한(handling) 협소한 물리적 환경으로 편입된다. 이 과정에서 정신성의 표상이었던 먹과 종이는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 구조를 모사하기 위한 순수한 물질적 재료, 즉 저급한 시각 데이터의 구성 요소로 전락한다. 이러한 전락은 권세진 특유의 공정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는 과거 거주지를 대구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공간적 한계를 수직의 화판 대신 수평의 책상을 택하는 전환점으로 삼았다. 이때의 제약은 커다란 화면을 작은 단위인 60x60cm의 종이, 10x10cm의 격자 단위로 분절해 그린 뒤 이어 붙이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했다. 여기서의 핵심은 그가 이 과정에서 이미지를 파편적으로 그려 나가면서 전체 형상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 진입한다는 점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감정적 몰입이나 전통 회화 특유의 즉흥적 필치를 배제하는 기능적 단계로 활용된다. 촛불과 연기로 채워진 세계에서 이러한 부자유한 격자의 규칙은, 역설적으로, 틀에 가둔 이미지들을 상징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순수한 물성으로만 존속하게 한다. 〈Flame〉(2026) 연작은 234장의 종이 유닛(unit)으로 분할된 3점의 대형 회화로 구성된다. 각 연작은 타오르며 변형되는 초와 불,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연기의 순차적 흐름을 추적한다. 주목할 점은 그가 대상의 주변적 요소를 활용해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이다. 초와 불, 연기에서 활성화된 밝은 영역은 종이 본연의 색으로 남겨지고, 그 외 여백과 명암만이 먹의 농담을 통해 어둡게 메워진다. 나아가 연작을 암전된 공간에 배치하고 원거리의 빛을 투사하여 화면의 가시성을 시지각적으로 유예하는 동시에 명도의 극적인 대비를 이끌어낸다. 즉, 화면 속 대상이 그것의 외부적 조건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구체화됨으로써, 먹과 종이는 매체가 지닌 관습적 맥락에서 벗어나 화면의 분절성을 강조하는 물질적 요체이며, 촛불과 연기는 이러한 구조적 공정을 촉발하는 선행적 원인임이 밝혀진다. 한편, 90x70cm로 화면 크기를 고정한 〈Smoke〉 연작은 엔트로피(entropy)가 정점에 도달한 상태를 가시화한다. 그가 포착한 연기는 웹에서 참조한 사진의 일부를 확대한 것으로, 정보값이 0에 가깝게 수렴하는 무질서의 극단이다. 무한히 확산하려던 연기는 잘게 구획된 격자 위에 옮겨지며 그 유동적인 흐름을 인위적으로 방해받는다. 이처럼 디지털 인터페이스에서 선택된 이미지가 회화적 공정으로 이행되는 과정은 이미지와 물질의 위계적 구분을 무너뜨리며 오직 표면적인 모방의 행위만을 남긴다. 이는 곧 엔트로피의 극점에서 해체된 형상이 건조한 규칙에 의해 재정렬되는, 이른바 회화적 ‘조각 모음’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조각 모음: Defragmentation》은 촛불과 연기를 매개 삼아 다양한 외적 조건에 의해 성립되는 이미지를 모색하는 실험이라 할 수 있겠다. 부유하는 파편을 규칙의 틀에 대입하여 일정한 공정의 결과로서 새롭게 발동시키는 것. 그의 회화는 오직 규칙과 물성에 기반한 비정형의 태도를 통과하며 이미지의 발생을 끌어내는 실천에 가닿는다.
모든 전시 정보에 대한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전시 정보는 변경되거나 오기입될 수 있으니 방문 전 각 기관에 확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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